누군가를 보고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자기와 멀리 떨어진 시대를 산 역사 인물일 수도 있고, 지금 시대의 유명한 누군가일 수도 있고, 친구의 친구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 사람을 보고 마음 어딘가가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무엇이었을까.
흔히 닮고 싶다는 마음을 결핍의 신호로 본다. "내게 없는 것을 그 사람이 가졌으니까 부러운 것이다." 이 해석도 일부는 맞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전혀 없는 자질에는 잘 끌리지 않는다. 노래와 아무 인연 없이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가수의 삶을 자기 삶처럼 바라보는 일은 드물다. "저 가수처럼 살고 싶다"는 감정이 떠오른다면, 그 안 어딘가에 노래로 향하는 감각이 이미 있다는 뜻일 수 있다.
닮음의 욕망은 결핍만이 아니라 잠재의 알아챔일 때가 있다. 자기 안에 이미 있던 무엇이 그 사람을 보고 "저쪽에 내가 있다"고 반응하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에 거울 자아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는 자기를 직접 볼 수 없고,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를 통해 자기 모습을 만들어간다는 생각이다.
이 생각을 한 발 더 가져가면, 자기 안의 잠재력도 직접 보기는 어렵다. 자기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보려면 거울이 필요하다. 그 거울이 어떤 사람일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닮고 싶다고 느낀다. 그 사람이 가진 것이 사실 내 안에도 있다는 감각이 마음에 떠오른 것이다.
그러니 닮고 싶은 사람의 목록은 그들이 누구인지보다 그 목록을 가진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준다. 이순신을 닮고 싶다는 사람, 빌 게이츠를 닮고 싶다는 사람, 무라카미 하루키를 닮고 싶다는 사람은 서로 다른 잠재를 가지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닮고 싶은 한 사람에게 자기를 완전히 겹쳐버리면, 오히려 자기가 사라진다.
스티브 잡스를 닮고 싶어서 검은 터틀넥을 입고 매일 명상하고 일찍 일어나도, 결국은 자기 자신이지 잡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잡스가 가진 단호함, 결정 방식, 버티는 힘이 자기 안에 이미 있던 무엇과 만날 때만 의미가 있다.
그래서 닮고 싶은 사람은 한 명보다 여러 명이 낫다. 다섯 명쯤을 두고 각자에게서 다른 부분을 가져온다. 한 사람의 단호함, 다른 사람의 너그러움, 또 다른 사람의 인내심. 그것들이 합쳐져서 자기만의 모자이크가 된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으니, 누구를 완전히 따라가도 완벽해질 수는 없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보고 "저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하게 든다면, 그것도 자기 안의 무엇이 반응한 것이다. 저게 나일 수도 있어서 무서운 것이다. 자기 안에 완전히 없는 자질에는 그렇게 강한 거부감이 일어나지 않는다.
닮고 싶은 사람과 닮고 싶지 않은 사람, 둘 다 자기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좋아하는 거울만 보면 자기의 절반밖에 모른다. 두 거울을 다 봐야 자기 전체가 보인다.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감정이 떠오를 때, 그것은 단순한 부러움만은 아니다. 자기 안의 무엇이 그 사람을 거울 삼아 자기를 보려는 시도일 수 있다. 그 반응은 가볍게 넘기지 않는 편이 좋다.
닮고 싶은 사람의 목록은 자기 잠재의 지도이고,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목록은 자기 그림자의 지도다. 두 지도를 다 그려야 자기 전체가 보인다.